최근 개봉했던 영화 '하얼빈'
이 영화 역시 우리나라 여러 문화예술작품에서 볼 수 있는
'안중근'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는데요.
영화를 보고 실화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셨던 분들을 위해
저 역시 그랬기에 블로그 내용 포스팅해보려고 합니다.
꼬꼬무 60회 '나는 아직 할 말이 많다!' 에도 안중근 실화가 소개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무장한 일본군들이 덕수궁을 포위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5개 조약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게 했습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했죠.
을사늑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을사5조약, 을사조약이라고도 하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일본은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한다.
제2조, 일본은 한국과 타국 사이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은 일본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어떠한 국제적 조약을 할 수 없다.
제3조, 일본은 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게 하며,
통감은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내알 할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효력이 계속된다.
제5조, 일본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당시 26살이었던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안중근은 자신의 재산으로 1906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합니다.
의병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안중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후 1908년 '대한의군'을 조직했고 참모총장으로서 300명의 병사들과 투쟁합니다.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게 항복한 게 아니다"
계속해서 승리를 거듭했지만 그는 포로들을 풀어주고 싶어했습니다.
영화 '하얼빈'에서처럼 동료들은 이를 반대했지만 결국 안중근의 뜻대로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들을 석방합니다.
(영화와 동일한 부분)
그러나 이후 이로 인해 일본군이 또다시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고
의병부대의 수많은 죽음을 보게 됩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직접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안중근은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왼손 약지를 잘라 피로 태극기를 그려 대한독립을 맹세합니다.
'단지 동맹회'
얼마 후,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계획을 준비합니다.
밑의 사진은 거사 직전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던 유동하(18살)와 함께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안중근은 현빈이, 우덕순은 박정민이 연기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채가구역에서 우덕순이 먼저 이토의 저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계획을 진행하기로 합니다.
미리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번도 이토를 실제로 만난 적 없었지만 9:30분
신문에서 봤던 그의 사진으로 도착한 이토를 바로 알아보았고
3발의 총을 쏘아 이토를 사살합니다.
그리고 "까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크게 외치며 러시아군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그 후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 테러리스트로 신문에 실립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죄를 15가지나 나열하며 이토 살해 명분을 주장했습니다.
안중근의 이야기를 다룬 유명한 뮤지컬 '영웅'의 넘버
'누가 죄인인가'가 바로 그 내용의 가사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안중근을 흉악한 살인범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안중근이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짓을 널리 알리려 했고
안중근의 재판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하지만 모든 법정 인물들이 일본인으로 구성시킵니다.
"우리는 침략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지금부터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들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 총장으로서 거사를 진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벌해달라고 했지만 일본은 사형을 선고해 버립니다.
"이토를 죽인 건 자객으로서 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 받고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고
이에 감동한 일본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안중근의 어머니는 편지와 함께 수의를 보냅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지 않으니
오늘 이후로 너는 신묘하게 형장에 나아가
내세에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거라'
그후 안중근은 죽은 뒤 자신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형 당합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사망 150일 후 1910년 3월 26일,
이토가 죽었던 날과 같은 시간에 사형되었지만
일본은 그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고 여순감옥 인근 묘지에 묻혔다고만 알려졌습니다.
동생은 형의 시신을 찾아 계속해서 헤맸고
2년 후 맹세 때 잘랐던 손가락을 겨우 찾았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감생활 중에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며 이는 전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일본은 집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주기로 했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사형을 집행했고 결국 이 책은 미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의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지만 첫째 아들 우생은
7살에 사망하였고, 둘째 아들 준생은
30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협박을 당했습니다.
현재 안중근 의사의 묘는 '효창공원'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현재 안중근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는 원보산, 동포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이며
뤼순 주변은 대부분 30년대 이후 개간되어 흔적을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일본이 돌려주지 않은 시신때문에 시신 없이 '가묘'로 모셔져 있습니다..
영화 '하얼빈'의 한 대사는 참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었는데요,
이 대사는 실제 안중근이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 앞에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 된다.
금년에 못 이루면 다시 내년에 도모하고,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민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 둘 것이다."
하얼빈 영화 속 허구의 인물들
이창섭 역 (이동욱)
밀정 엄인섭이 대한의군에서 최재형 다음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모티브를 따 만든 가상 인물입니다.
김상현 역 (조우진)
김상현은 실존 인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단지 동맹회를 함께했던 김기룡, 통역을 담당했다 밀정으로 변절했던 엄인섭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 인물이라고 합니다.
공부인 역 (전여빈)
공부인도 실존 인물이 아닌데요,
안중근과 함께 하얼빈에 갔던 유동하 의사와
남편이 죽고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오향선 여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